소박파 화가인 앙리 루소는 “예술가의 스승은 자연”이라고 했다. 화가는 자연에서 모든 것을 배운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꼭 스승이 자연뿐 일 필요는 없다.1960년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시인 김수영은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라고 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한 예술가에게 최고의 스승은 현실이라는 것이다.분명 현실은 화가들에게 그 어떤 표현과 충동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며, 화가들은 그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이렇게 화가들은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상황을 작가의 독특한 언어나 화법으로 담아낸다.그래서 이번 장범순 작업의 스승은 전적으로 오
“사랑은 흘러간다 이 물결처럼우리네 사랑도 흘러만 간다어쩌면 삶이란 이다지도 지루한가희망이란 왜 이렇게 격렬한가” - 아폴리네르(시인) 화실의 벽면에 걸린 김경희 작가의 대형 작품을 보는 순간 나는 충분히 황홀해 했다.파블로 피카소의 명언이 마치 그를 위한 것처럼 떠올랐기 때문이다.“마티스 이후 진정 색채가 무엇인지 이해한 화가는 샤갈뿐이다.”거의 모든 그림을 보아도 색채에 관한 한 샤갈은 20세기 최고의 사랑을 받은 색채 화가였다.그는 매우 풍부하고 다양한 색채를 사용했지만, 특히 빨강·파랑·노랑 그리고 초록색에서 그 진가를 발했
예술가들에게 있어 문자는 어떤 의미와 가치 그리고 역할이 있을까?동서고금의 많은 예술가들이 글씨 또는 문자로 그들의 깊은 예술세계와 정신적 메시지를 드러내 왔다는 사실은 이 물음에 답을 명확하게 해준다.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그러했고, 왕희지의 초서가 그러했고 현대에는 설치작가 로버트 인디아나(R.Indiana)가 그랬다.여기 두 작가의 각각 다른 메시지가 있다. “나는 살아있다. 나는 여기에 있었고, 여기에서 숫자를 적고 있었다.” “시간을 기록하고 동시에 정의해 나아가는 점진적인 과정, 바로 이것이 평생 내가 계획하고 본질적
김명식 작가의 고향은 서울이다. 1949년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에 는 구역상으로는 서울이었지만 당시로써 너무나 변두리였고, 작가의 어린 시절에는 심지어 전기도 안 들어오는 곳에서 태어났다.그러니 당연히 그가 살던 어린 시절의 언덕배기에 집을 그는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예술가는 결국 자기가 태어난 그 고향의 흔적과 환경을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님을 다시금 알게 된다.화분으로 작업을 하는 쟝 피에로 레이노가 원예과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그렇고, 세계적인 조각가 세자르가 궁핍했던 학창시절 자동차 폐차장에서 아르바이트했던
드디어 3월, 그리고 4월 꽃피는 봄날이 왔다. 그 봄은 제일 먼저 최지윤 작가의 화폭에서 피어났다. 아름답고 우아하게, 온통 화사한 모습으로 지천에 핀 꽃들이었다. 그러나 저희들 꽃들만 온 것은 아니었다. 지독하게 화려하고 고혹적인 자태를 지닌 새들도 함께 데불고 왔다.사람들은 그런 그림들을 일컬어 화조화(花鳥畵)라 부른다. 기본적으로 화조화는 꽃과 조류를 그린 그림을 일컫지만, 흔히 보편적으로는 동물과 식물이 그려진 모든 그림을 통칭한다.거슬러 올라가면, 그러한 화조화는 선사시대 반구대 암각화부터 조선 시대 민화를 거쳐 현대에
김재관의 회화는 전통적 유형의 표현형식 체계에서 비껴 나 있으며 또한 일체의 회화적 감성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주목할 만하다.특히 회화가 보편적으로 그림이 가져다주는 시각언어의 즐거움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니 그러한 생각이나 의지가 없다는 점에서 감성적이기보다는 이성적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 회화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의 화면은 온통 사각형 또는 삼각형등 기하학 세계로 가득 차 있다. 적어도 그에게 기하학적 조형이란 금세기 회화에 중요하게 대두되고 있는 그리드(Grid) 즉 평면성의 정의, 평면을 받쳐주는 기본적인
어느 미술사학자는 폴 세잔느가 사과를 그린 이후로 화가들이 그린 사과가 사람들이 먹어치운 사과보다 더 많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그렇다면 아마도 지구상에 살고 있는 여자의 숫자보다 예술가들이 그림으로 그린 숫자와 조각으로 만든 여자가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화가나 조각가에게 있어 여체라는 대상은 모든 사물을 표현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예술적 대상이 되어 왔다.그런 이유로 동서를 막론하고 여체에 관한 예술가들의 탐구는 그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거슬러 올라간다. 1909년 오스트리아의 빌렌도르프에서 발견된 10.3cm
거대한 전시장 공간에 100호를 넘나드는 대형작품들이 전시돼 있다.그것은 색채 중심이다. 빨강, 파랑, 혹은 검은 색 바탕위에 다양한 컬러의 물감 색선들이 위에서 아래로, 좌우로 끊임없이 흐른다.혹 감상자들은 이게 뭐지? 작가는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할까? 왜 위에서 아래로 물감들을 흘려 보낼까? 권기자의 작품 앞에서 그런 질문은 언제나 유효하고 가능하다.그러나 이 작품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잠시 1950년대 프랑스의 미술운동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비평가 펠릭스 페네옹(Félix Fénéon)은 기존의 아카데미즘
이왈종 작가는 1974년 대한민국 최고의 권위를 가진 23회 국전에서 문화부 장관상을 받으면서 일약 화단에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전통적인 동양화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독자적인 시각과 기법으로 한국화의 가능성을 독창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엄청난 수상의 영예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자만하지 않고 더욱 겸손했고 작업은 치열했다.1983년 라는 연작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이왈종은 한국화의 새로운 기수로 평가받았다.당시 한국화단에서 동양화의 위치는 대중들에게도 버림받고, 컬렉터들도 모두 등을 돌린 절체절명의
벨기에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 작품에는 유독 천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의 작품이 곧 잘 등장한다.그는 처음에는 조르쥬 드 키리코 화풍의 괴이한 물체나 인간끼리의 만남 같은 풍경을 그리다가 1936년부터는 불가사의한 힘을 끄집어내는 듯 매력적인 세계를 리얼하게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천을 뒤집어쓰고 강물에 투신한 그의 어머니 모습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마그리트가 체험한 개인적 삶 때문이다.작가의 그림이 스스로의 삶과 체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마그리트는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이다.허승연의 초기 작품